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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메이트 퀴즈

11. 1.(월) 리브메이트 오늘의 퀴즈 정답!!, 통영국제음악제는 '이 사람'을 추모하는 음악제이다.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던 '이 사람'은 누구인가요?, 윤이상, 안익태, 현..

by 휘여리 2021.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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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1월이네요~ 올해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ㅜㅜ 다들 하시는 일 화이팅입니다!!

오늘도 리브메이트 퀴즈를 풀어보자!! 출첵도 해주고!!

 

 

 오늘의 문제는 '통영국제음악제는 '이 사람'을 추모하는 음악제이다.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던 '이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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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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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월) 리브메이트 오늘의 퀴즈의 정답은 !!!

"윤이상" 이다.

 

윤이상

작곡가.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았다. 독일에 귀화하여,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 연주한 《심청》, 《나비의 꿈》,《광주여 영원하라》등의 작품이 있다.

 

경남 산청 출생.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1935년 오사카[大阪]음악학교에 입학, 1937년 귀국하였다.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1956년 프랑스로 가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19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강제소환, 2년간의 옥고를 치뤄야만 했으나, 세계음악계의 구명운동을 힘입어 풀려났다.

 

1971년 독일에 귀화하고,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의 《심청》을 비롯,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196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1981),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1994)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산파(産婆) 역할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이상 [尹伊桑] (두산백과)

 

 

안익태

한국의 작곡가·지휘자. 1936년에 《애국가》를 작곡했다. 마요르카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지냈다. 문화포장을 받았으며 사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퇴학당한 뒤 일본에 건너갔다. 1921년에 도쿄[東京] 세이소쿠 중학[正則中學]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여 마쳤다. 1926년에 구니타치[國立]음악학교에 들어가 첼로를 전공하였다. 방학 중에는 귀국하여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1930년에 미국 신시내티음악대학에 입학하였고, 재학중이던 1932년에는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제1첼로 주자로 활약하였다. 1932년에 필라델피아음악대학에 편입하였다. 그 무렵 스토코프스키와 교분을 맺었으며 필라델피아의 카네기리사이틀홀 등에서 독주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

1935년 6월에 필라델피아음악대학을 졸업하였다. 1936년에 처음 유럽을 방문하여 오스트리아 빈에서 바인가르트너에게 베토벤 음악을 배우며 지휘 및 작곡 공부를 하였다. 1936년에는 몇년 전 미국에서부터 착상해 왔던 《애국가》를 작곡했다. 1937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에 특별연구생으로 들어가 코다이의 지도를 받았다.

1940년까지 슈트라우스의 보조지휘자로 있다가 그 이후부터는 독일, 스페인 등지에서 독자적 지휘활동을 하고 1946년에 스페인 여인과 결혼, 스페인 국적을 얻고 마드리드 마요르카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영국·이탈리아·미국 등의 저명한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도 하였다.

1955년에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귀국하였다. 1961년 다시 귀국하여 국제음악제를 개최토록 하였으며 1963년까지 3회에 걸쳐 주관하였다. 후기낭만파에 속하는 지휘자로서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자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작품을 즐겨 지휘했다.

1965년 스페인에서 병사했다. 1957년 문화포장을 받았으며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에 《애국선열추도곡》 등 다수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익태 [安益泰] (두산백과)

 

 

 

현제명

한국의 성악가, 음악교육자. 친일 단체인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 가담해 친일 활동을 하였으며 양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1902년 대구 남산동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대구 대남국민학교와 계성학교(啓聖學校)를 다녔고 대구 제일교회 성가대에서 단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피아노·바이올린을 배웠다. 1923년 졸업 후 전주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6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1927년 시카고 소재 무디(Moody) 성경학교에서 수학한 뒤, 이듬해 인디애나주(州) 레인보우 소재 건(Gunn)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뒤 연희전문학교 음악부 주임을 거쳐 1930년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1937년 5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한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에 회원으로 가입하였는데 일본과 조선의 문예인 30여 명이 활동하였다. 그해 6월에 발생한 독립 계몽운동 단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를 계기로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면서 그의 친일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그는 일본 신민이 되어 대동아건설을 찬양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도 가담하여 경성지부 간사를 지내며 봉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산하고 경성음악협회를 창립 발기인, 간사로 참여하였다. 당시 이름은 구로야마[玄山濟明]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1년에는 친일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 이사를 맡았고, 이 협회에서 주관하는 음악회에서 일제를 찬양하는《후지산을 바라보며》를 작곡해 발표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이 태평양전쟁의 결전과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만든 가창지도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가창지도대는 전국을 순회하며 일제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조선의 민족정신을 약화시키는 노래를 불렀다. 1942년에는 '음악보국'을 목적으로 하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을 결성하고, 1944년 이 악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그의 친일 활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일제가 황국신민 배출을 목적으로 설립한 경성대화숙(京城大和塾)이 주최한 음학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경성대화숙 부설 경성음악연구원을 개설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고려교향악단(高麗交響樂團) 설립 이사장(1945)을 지냈고, 1946년 경성음악연구원을 경성음악학교로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으며그해 8월 경성음악학교가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편입되면서 초대 음악대학장이 되었다. 이후 한국음악가협회 위원장(1953), 서울특별시 문화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1960년 10월 16일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1965년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에 오페라 《대춘향전》《왕자호동》이 있고, 가곡으로 《고향생각》《그 집 앞》《뱃노래》《진달래》《바다로 가자》《희망의 나라로》《나물캐는 처녀》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제명 [玄濟明] (두산백과)

 

 

오늘은 평소와 다른 문제였네요 ㅎㅎ

조금생소하기도 했지만 또 하나 배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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