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의 시작은 리브메이트죠~!!
오늘도 리브메이트 퀴즈를 풀어보자!! 출첵도 해주고!!
오늘의 문제는 '중국의 영화 제작 규정에 따르면 배우의 출연료로 사용되는 비용이 전체 제작비의 몇 퍼센트를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을까요?' 이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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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5.(월) 리브메이트 오늘의 퀴즈의 정답은 !!!
"40%" 이다.
중국영화[Chinese cinema]
중국 영화의 뿌리는 1908년 경극(京劇)을 각색해 찍은 필름이었다. 그 후 1917년 난징(南京)에 영화사가 설립되면서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영화 제작사들도 하나 둘 설립됐다. 1922년에는 배우 양성 기관이 처음으로 개설되기도 했다. 그 무렵 유성 영화의 등장은 중국의 영화 산업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초기 유성 영화가 관객의 외면을 받은 이유는 중국 전역에 걸쳐 퍼져 있는 많은 방언들 때문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수립되자 영화는 국유화됐다. 이때부터 영화는 국가 정책과 이념의 선전 도구로 전락했다. 검열 체계가 가동하면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예술가의 해석을 당이 지도한다는 관점이 확립되기에 이른다. 주은래(周恩來)는 2차 문학예술노동자총회(文學藝術勞動者總會)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혁명적 리얼리즘과 혁명적 낭만주의로 구성된다고 선언했다. 체제의 우월성과 혁명의 가치를 선동하는 영화들이 양산되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질은 자연히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중반 중국 사회를 격변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문화대혁명은 중국 영화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화 제작이 거의 중단되어 중국 영화는 다시 한번 침체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1950∼1960년대 만들어진 대다수의 영화들이 인민재판용으로 분류되었으며 감독과 작가, 배우들 상당수가 유배당했다. 1963년에는 장편 영화 480편이 제작됐으나 그 후 1967∼1972년까지 극영화 제작이 거의 중단됐다. 이 시기 중국의 영화 산업은 완전히 토대를 잃었다.
1973년부터 과거의 영화인들이 복귀하면서 재건을 모색하던 중국 영화는 1980년대 혁명적으로 변화한다. 10년 이상 폐쇄됐던 베이징국립영화학교(北京國立映畵學校)가 1978년 다시 문을 열었고 국가와 영화 산업의 관계도 새롭게 정립됐다. 시장 경제를 계획 경제의 일부로 통합하는 작업에 따라 정부는 영화에 대한 재정 지원을 철회했고 스튜디오들은 독자 생존의 길을 가야 했다. 시장 경제의 원리가 파고들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선전’에서 벗어나 대중을 생각하는 예술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른 바 ‘5세대 영화’가 등장했다. 1980년대 중반 5세대 영화라는 이름으로 중국 영화는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국가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인민들의 생활과 보편적인 문제들에 천착한 것이 5세대 영화의 경향이었다. 5세대 영화의 출발을 알린 신호탄은 첸카이거(陳凱歌) 감독이 연출하고 장이모우(張藝謀)가 촬영한 영화 〈황토지〉(黃土地, 1984)이다. 〈황토지〉는 공산당에 의해 기소되어 상영 금지를 당했지만 국제 영화제를 통해 중국 영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전환점이 됐다. 그 후 첸카이거 감독은 〈대열병〉(大閱兵, 1985), 〈아이들의 왕〉(孩子王, 1987)으로 연이어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했고 촬영 감독 출신인 장이모우 감독 역시 〈붉은 수수밭〉(紅高梁, 1988)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들 외에도 티엔주앙주앙(田壯壯) 감독의 〈말도둑〉(盜馬賊, 1986), 황지엔신(黃建新) 감독의 〈흑포사건〉(黑砲事件, 1985) 등 많은 문제작들이 쏟아졌다.
장이모우 감독은 동시대 5세대 감독들 중에서 가장 돋보였는데 다른 감독들과 달리 감각적이고 대중적인 영화로 인기를 끌었다. 강렬한 색채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이모우의 탐미주의는 〈붉은 수수밭〉에서 〈국두〉(菊豆, 1990), 〈홍등〉(紅燈, 1991)으로 이어지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5세대 감독들이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개방 정책에 의해 베이징국립영화학교에서 다양한 영화 교육을 받았고 서구 영화도 쉽게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5세대의 한계는 분명해졌다. 중국 영화의 세계화라는 목표에 집착했던 5세대 감독들은 중국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이후 세대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됐다. 1990년대 이후 5세대의 이러한 성향을 꼬집으면서 등장한 것이 6세대 감독들이다.
5세대가 베이징국립영화학교라는 터전에서 발원한 것이라면 1990년대 이후 등장한 6세대들은 1989년 발발한 천안문(天安門) 사태의 영향력 아래 있다. 6세대 감독들은 천안문 사태 이후 보수주의가 다시 영화를 장악하고 검열도 강화된 상황에서 등장했다. 6세대는 ‘독립 제작’을 통해 창작의 자유를 얻으려 했다. 이들은 재정적인 지원 없이 강력한 검열 아래서 작업했기 때문에 대부분 자국 내에서 개봉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었다. 6세대의 기수로 알려진 장유엔(張元) 감독은 〈북경 녀석들〉(北京雜種, 1993), 〈동궁서궁〉(東宮西宮, 1996) 등을 통해 중국 내에선 금기시된 소재인 젊은이들의 방황, 동성애, 가족의 문제를 과감하게 전면화했다. 장유엔의 뒤를 이어 장밍(張明), 지아장커(賈樟柯), 로우예(婁燁) 등 많은 젊은 감독들이 과감한 소재와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영화가 중국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의미로 ‘지하 영화’(地下映畵)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6세대 감독들은 정부의 가혹한 검열과 탄압 속에서 힘겹게 영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5세대의 우회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느끼는 중국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제시해 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핍박은 예정된 것이었다. 상영 금지는 물론, 중국 내에서 활동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창작의 권리 자체를 박탈당한 이들도 있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일고 있다. 중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6세대 감독들에 대한 해금 조치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2004년 1월, 지아 장커에 대한 작품 활동 제한이 풀렸으며 상영 금지됐던 왕샤오슈아이(王小帥)의 〈북경 자전거〉(十七歲的單車, 2001)가 개봉하는 등 자유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중국 영화계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영화만을 상영한다’는 기존의 원칙에서 탈피해 연령별 등급제 실시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규제 완화와 함께 중국의 지하 영화감독의 활동이 어떤 전기를 맞게 될지가 당면한 관심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중국 영화 [Chinese cinema, 中國映畵] (영화사전, 2004. 9. 30., propaganda)
중국의 영화 규정은 못 찾겠어요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중국 영화의 유래나 좀 찾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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