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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메이트 퀴즈

리브메이트 일반상식퀴즈 214회차 정답,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금메달을 딴 종목은 무엇일까요?,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by 휘여리 202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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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메이트 일반상식퀴즈 214회차 정답!! 30p 적립하자~~!!

 

리브메이트 일반상식퀴즈 214회차를 풀어보자!!!

 

 

 

 

리브메이트 일반상식퀴즈 214회차를 풀어보자!!!

 

1.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금메달을 딴 종목은 무엇일까요?

 

2.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일까요?

 

3. 10월16일은 국민들에게 문화의 의의와 중요성에 대한 관심을 확산하기 위해 제정한 날을 [예술의 날]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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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1. 레슬링

 

2. 부산, 마산

 

3. X

 

제21회 올림픽 경기대회[The 21st Olympic Games]

1976년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경기대회.

 

1976년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개최되었으며, 92개국에서 6,084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였다. 치밀한 대회 운영이 돋보인 한편으로 인종차별 문제로 인하여 아프리카 지역의 26개국이 불참함으로써 오륜(五輪)이 아닌 사륜(四輪) 대회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70년 IOC 총회에서 소련의 모스크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와 경합 끝에 몬트리올 유치가 결정되었다. 주최국 캐나다는 국호(國號) 문제로 타이완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이전 뮌헨올림픽대회의 '검은 9월단 사건'을 교훈 삼아 역대 올림픽대회 사상 가장 엄중한 경비를 펼쳤다.

경기는 근대5종·농구·레슬링·배구·복싱·사이클·수영·승마·양궁·역도·요트·유도·육상·조정·체조·축구·카누·펜싱·하키·핸드볼 등 21개 종목, 198개 세부종목이 치러졌다. 체조 여자부에 출전한 루마니아의 14세 신예 나디아 코마네치는 단체·개인·종합·이단평행봉·평균대 종목을 모두 휩쓸며 6경기에서 10점 만점을 얻었고, 금·은·동메달을 각각3·1·1개 획득하여 여자 체조계의 새로운 요정으로 등장하였다. 또 소련의 한국인 2세 넬리 김은 도마·마루운동에서 우승하여 코마네치와 쌍벽을 이루었다.

육상에서는 작은 섬나라인 트리니다드토바고·자메이카·쿠바가 남자100·200·400·800m를 모두 휩쓸었다. 쿠바의 알베르토 후안토레나 남자 육상 800m에서 세계신기록을, 헝가리의 미클로스 네메스는 남자 투창 경기에서 90m의 벽을 허물고 94m 58㎝로 세계신기록을 세웠으며, 미국의 에드윈 모제스도 남자 400m 허들 경기에서 47초 64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복싱에서는 슈거 레이 레너드가 라이트웰터급에서, 리언 스핑크스와 마이클 스핑크스 형제가 각각 라이트헤비급과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이들은 이후 프로로 전향하여서도 각각 세계 챔피언에 오르는 등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은 72명의 선수단이 레슬링·배구·복싱·사격·유도 등의 종목에 출전하였다. 레슬링 페더급의 양정모는 정부 수립 이후 첫 금메달을 획득하여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였다. 또 유도 라이트급의 장은경이 은메달을, 유도 무제한급의 조재기와 미들급의 박영철,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의 전해섭이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였고, 여자 배구팀도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인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한국은 이로써 금·은메달을 각각 1개씩 획득한 북한(21위)을 앞지르고,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로 종합성적 19위를 차지하였다. 종합 메달 순위는 금,은,동 총 125개 메달을 획득한 소련이 1위를 차지하였고, 총 94개의 메달을 획득한 미국과 총 90개의 메달을 획득한 동독이 그 뒤를 이었다. 금메달 순위에서는 소련이 49개로 1위를 유지하였고, 동독이 40개로 34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미국을 앞섰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21회 올림픽경기대회 [The 21st Olympic Games] (두산백과)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1979년 10월 16일부터 5일간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발하며 일어난 민주화운동으로, 부산과 마산의 첫 글자를 따 '부마민주항쟁'이라고 명명됐다. 당시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내려 시위를 진압한 뒤 1560여 명을 연행하고 120여 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민주화운동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발하며 벌어진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당시 박정희 정부에 의하여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 등의 사건이 발생하자,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었다. 이에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 10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부산대와 동아대 학생 5000여 명이 거리로 나와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고, 여기에 시민들까지 합세하면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곧 마산과 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부산, 마산, 창원 등으로 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사태를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에 10월 18일 새벽 0시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단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산 지역에서만 1058명이 연행되고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마산 및 창원 일대에는 10월 20일 정오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계엄령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부마민주항쟁은 단시간에 진압되었으나 이후 1주일도 되지 않은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에 의해 죽음을 맞았고, 이에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한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10년 7월 12일,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시위에 참여하였던 학생과 시민들이 군인과 경찰의 진압·수사 과정에서 불법구금 및 가혹행위 등을 당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부마민주항쟁 과정의 피해자를 확인하고 명예회복 및 피해 구제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후 2012년 4월 4일 처음으로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하여야 한다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이 나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마민주항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예술의 날에 대한 정보는 따로 못 찾겠네요 ~~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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